2022년 12월 9일 금요일

[작문] #5. 불을 켜고 전원을 올린다

불을 켜고 전원을 올린다. 자동화된 시스템이 차례대로 설비를 준비하는 동안 공간을 둘러본다. 특별한 점은 없다. 쓰레기 한두 개를 줍고, 비품을 가지런히 한다. 밤새 차게 식은 공간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입고 왔던 베이지색 점퍼를 벗고 작업복을 걸친다. 점퍼는 두툼하니 추위를 막기에 아주 좋았지만 행동이 둔해졌다. 그래서 날씨가 추워지면 나는 실내용 작업복을 따로 준비하였다. 작업복으로 입는 바람막이는 밖에서 입기엔 다소 얇았으나 적당한 두께감이 실내 활동에는 제격이었다. 거기에 주머니가 많아 여러 도구를 가지고 다니기 좋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리면 턱 위까지 올라와 포근했다. 짙은 까만색은 어둠 속에 나를 감추기에 충분했고,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고정 직원이 나 뿐인 이 곳에서, 매일의 일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마저도 직접적으로 지시받은 일은 아주 적다. 나머지는 이곳의 존재 목적과 가치에 따라 내가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이 시설의 존재 목적을 위해 나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다.

신(神)이 내게 하사한 능력을 꼽아보자면, 주위를 둘러보는 섬세함과, 처음 해보는 일도 깊이 알아보고 결과를 내는 준비성과 실행력이다. 모든 일에 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시설에서 필요한 만큼은 채울 수 있었다. 구석구석 내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고, 내 눈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손대선 안 되는 곳을 제외하곤 모든 곳에 나의 흔적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부터 나는 하나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늘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수시로 인터넷을 뒤졌고,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높은 효율을 내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전문가’ 같은 결과를 내는 일에 열중했다. 신생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는 내가 맡은 전공 분야에서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익숙함에 물들어 정체되기를 꺼려 시스템이 안정화 되려 하면 조금의 변화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나쁜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모든 결과는 경험치와 노하우로 쌓여갔다.

슬럼프(slump)가 왔다. 혹은 번아웃(burn-out)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머릿속은 흐리멍덩했고 약한 두통이 계속되었다. 입에 영양제를 털어 넣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도통 가시지를 않았다. 정신의 문제는 나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에는 생기가 사라졌으며, 인간관계는 기계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했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쓸 마음이 아니었다. 마침내 시스템에 몸을 맡긴 채 일하는 육신만 남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죽어갔다.

하는 모든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도움 받은 이들은 고마움을 표했으나, 이는 일부일 뿐이었다. 드러낼 기회가 없으니—나는 내가 한 일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다—이해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머릿속으론 이 마음을 달랠 수십 가지의 말이 떠올랐으나, 마음은 수백 가지 억울함을 호소했다. 너무 힘들 땐 이 마음을 들고 누군가를 찾기도 했지만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공허한 말만을 늘어놓았다.

지독히 외로웠다.

내가 두 명, 아니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했다. 그러면 얘기도 나누고, 일도 나눌 수 있을 텐데. 신은 왜 나를 여기에 두고 이런 일들을 하게 하셨을까, 끊임없이 물었다. 그만둘 때가 되었을까, 내가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일까, 무수히도 물었다. 신은 무엇 하나 명확하게 답하지 않으셨다. 다만 가만히 안아줄 뿐이었다.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를 대신하셨다. 문득 예수가 떠올랐다. 그의 뜻을 가장 가까운 사도들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위로를 받았을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까만 작업복을 벗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베이지색 점퍼를 집어 든다. 장비의 전원을 내리고 비품을 정리한다. 최소한의 불빛만 남긴 채 불을 끈다. 문을 잠근다. 오늘과 다를 바 없을 내일을 예상하며, 내일은 좀 다르기를, 내일의 나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달그림자가 선명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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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6)
*[작문] 말머리의 글들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단체와 관련이 없는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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